카도쿠라 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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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도쿠라 켄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한 투수이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 야구 기구(NPB)에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코치로 활동했다. NPB에서는 주니치 드래건스,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고, KBO에서는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다. 2005년에는 NPB에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2010년에는 KBO에서 월간 MVP를 수상했다. 2021년에는 실종되었다가 22일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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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도쿠라 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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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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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Ken Kadokura |
일본어 표기 | 門倉 健 |
로마자 표기 | Kadokura Ken |
한국어 표기 | 카도쿠라 켄 |
출생일 | 1973년 3월 9일 |
출생지 | 일본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
신장 | 193cm |
체중 | 90kg |
포지션 | 선발 투수/투수 코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년도 | 1996년 |
드래프트 순위 | 1995년 2차 지명 (역지명), 주니치 드래건스 |
첫 출장 (NPB) | 1996년 7월 26일 |
첫 출장 (KBO) | 2009년 4월 18일 |
마지막 출장 (NPB) | 2008년 5월 17일 |
마지막 출장 (KBO) | 2011년 7월 16일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주니치 드래건스 (1996년–1999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2000년–2003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04년–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7년–2008년) SK 와이번스 (2009년–2010년) 삼성 라이온즈 (2011년) 이타테 세이가오카 병원 |
코치 경력 | |
소속 구단 | 삼성 라이온즈 투수 인스트럭터 (2013년–2014년) 삼성 라이온즈 불펜 코치 (2015년)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 (2019년–2021년) |
NPB 기록 | |
승-패 | 78–82 |
탈삼진 | 1146 |
평균 자책점 | 4.36 |
KBO 기록 | |
승-패 | 27–17 |
평균 자책점 | 4.03 |
탈삼진 | 303 |
수상 | |
수상 내역 | 한국시리즈 우승 (2011년) |
2. 생애
카도쿠라 켄은 13년간의 일본 야구 기구(NPB) 생활을 마치고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SK 와이번스에서 데뷔했다.[1] SK 와이번스에서는 2010년 14승을 기록하며 팀의 정규 리그 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1995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건스 2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7월 28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데뷔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그 해 7승을 기록했다.[18] 데뷔 첫 해 올스타전 이후 시즌 후반에만 14경기에 등판하여 7승 3패, 평균 자책점 3.11, 3완투(1완봉), 65탈삼진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1997년에는 153⅔이닝을 던져 10승을 거두었지만, 12패를 기록하며 불안정한 모습도 보였다.[23] 1998년에는 26경기에서 10승 9패, 평균 자책점 3.40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1999년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2승 4패의 성적에 그쳤다. 시즌 후 고이케 히데오, 사노 시게키, 젠무라 가즈히토와 3 대 3 트레이드로 고이케 다쿠이치, 히가시세 고타로와 함께 퍼시픽 리그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로 이적했다.[36]
2000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로 이적한 후 구원 투수로 시즌을 시작했으나, 이후 선발로 전환되어 7승 9패를 기록했다. 2001년에는 개인 첫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8승 5패를 기록하며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38] 2002년에는 승리 없이 시즌을 마감했고, 2003년 시즌 후 후쿠모리 가즈오, 야노 에이지와의 트레이드로 우다카 신지와 함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 이적했다.[40]
2003년 시즌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이적했다. 2004년 6월 23일 야쿠르트전에서 요코하마 이적 후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동시에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홈런을 쳐냈다. 2005년 8월 20일 주니치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면서 역대 네 번째인 ‘전 구단 승리’를 달성했다. 2005년에는 11승을 올리며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고, 미우라 다이스케와 함께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석권했다. 2006년에는 10승(1구원승 포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지만, 시즌 후 FA를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2006년 FA를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2007년에는 개막 2차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패전 투수가 되었고, 이후 1승 5패, 평균자책점 5.97로 부진했다. 2008년에는 11경기에 등판하여 승리 없이 시즌을 마감했고,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2009년 1월 20일,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방출되었고, 이후 SK 와이번스와 계약하며 한국 프로 야구 무대에 진출했다.
2011년 1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하며 KBO 리그 생활을 이어갔지만, 무릎 부상으로 방출되었다.[69]
은퇴 후인 2019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으나,[50][51] 2021년 5월 코치직에서 사임했다.[2] 같은 해 실종되었다가 22일 만에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3][4]
2. 1. 프로 입단 전
이루마 시립 후지사와히가시 초등학교와 후지사와 중학교를 졸업했다.[8]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90 센티미터에 달하는 장신 투수로 주목받았다.[9] 어릴 적에는 하라 다쓰노리의 팬이었다.[10]사이타마현의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 에이스로 두각을 나타냈다.[11] 시로이시 노리유키가 주장인 가스가베 교에이 고등학교를 상대로 상성이 좋지 않아,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춘계 대회, 춘계 간토 대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사이타마 대회 모두 결승전에서 시로이시에게 홈런을 맞는 등 1-3으로 가스가베 교에이에게 패배하여 고시엔 출전은 없었다. 1991년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지명 후보로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지명을 받지 못했다.[12]
1992년 도호쿠 복지 대학에 진학하여 경식 야구부에 소속되었다. (동급생: 후쿠모토 아시아) 대학 시절에는 구속 147 km/h를 기록한 적이 있으며, 사사키 가즈히로나 사이토 다카시 (모두 당시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소속)를 키운 이토 요시히로 감독으로부터 "사이토의 학생 시절보다 낫다. 좀 더 몸쪽을 공략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3학년부터 에이스로 와다 가즈히로와 배터리를 이루었으며, 4학년 때는 대학 선수권에서 1학년인 우에하라 고지와 맞붙어 승리하는 등 준우승의 원동력이 되어 1995년 드래프트의 주목 선수로 떠올랐다. 3학년 봄부터 4시즌 연속 베스트 나인. 또한 미일 대학 야구와 199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1995년 드래프트 회의 전에 센트럴 리그의 주니치 드래건스를 역지명하여, 회의 당일인 11월 22일에 주니치로부터 2위 지명을 받아, 본격파 투수로서 기대를 받으며 입단했다. 같은 해 11월 30일에 계약금 1억 엔 + 성과급 5000만 엔, 연봉 1200만 엔으로 주니치와 계약했다. 동기 입단에는 아라키 마사히로, 와타나베 히로유키, 마스다 다이스케 등이 있다. 마스다와는 후에 오사카 긴테쓰에서도 함께 선수 생활을 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같은 해 신인 선수들을 꼼꼼하게 육성하는 방침이었지만, 문카도는 1996년 올스타 이후 1군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2. 2.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95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건스 2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1996년 7월 28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데뷔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그 해 7승을 기록했다. 시즌 초 2군에서 3연패를 당하며 어려움을 겪었지만, 모리나카 치카라 2군 투수 코치의 조언을 받아 좋은 투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18] 7월에 1군에 승격, 7월 2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프로 첫 등판, 이틀 뒤 같은 경기에서 프로 첫 승리 투수를 거두었다. 8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프로 첫 선발 완봉 승리, 10월 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첫 무사사구 완투 승리를 기록했다. 10월 6일 나고야 구장 마지막 공식전이 된 요미우리전에서도 선발 등판했다. 최종적으로 이 해에는 올스타전 이후 시즌 후반에만 14경기에 등판(11선발)하여 72⅓이닝을 던져 7승 3패전 투수·평균 자책점 3.11, 3완투(1완봉), 65탈삼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오른쪽 팔꿈치 염증이 발견되어 가을 캠프에서는 투구할 수 없었다.[19] 그동안 달리기 훈련을 통한 하반신 강화에 집중했다.[20]
1997년 개막 전에는 "타도 요미우리"를 목표로 속구를 연마할 것을 목표로 내걸었고,고마츠 다쓰오 투수 코치로부터 노구치 시게키와 함께 "10~15승은 계산할 수 있다"라는 기대를 받았다.[21] 같은 해 팀의 투수진이 야마모토 마사나 선동열을 제외하고 부진한 가운데, 153⅔이닝을 던져 두 자릿수 승리(10승)를 거두었지만 투구는 불안정했고, 12패를 기록했다.[23] 또한 팀에서 가장 많은 20도루를 허용했다. 같은 해 오프부터 1998년 개막 전까지 미야타 세이텐 투수 코치로부터 조언을 받아 장신을 살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면서 구위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폼 개조(글러브를 높이 들고 무게 중심을 뒤에 남겨 앞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는 폼)와 낮은 쪽으로의 제구력 개선에 힘썼다.[25]
1998년 시즌은 폼에 계속 고민했지만 그것이 굳어지자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게 되었고, 26경기(160이닝)를 던져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인 10승 9패, 평균 자책점 3.40을 기록했다. 이 중 한신 타이거스 상대로 4승, 야쿠르트 상대로 3승을 거둔 반면, 요미우리전에서는 0승 2패로 끝났다. 같은 해 오프, 퍼·리그다승 투수인 다케다 가즈히로가 FA권을 행사하여 주니치에 입단하여 그와 오른쪽 에이스 자리를 다투게 되었다.[26]
1999년 개막 전에는 야마모토 마사·노구치·다케다·가와카미 겐신과 함께 5명이 선발 로테이션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어, 스프링 캠프에서는 많은 공을 던졌던 다케다에게 자극을 받아 자신도 야마모토 마사나 노구치와 함께 많은 공을 던지는 등 하이 페이스로 조절하고 있었다.[27] 그러나 매일 150~200개의 공을 던지던 다케다를 의식하여 지나치게 던진 것과 캠프 중에 팔꿈치가 처지는 경향이 있던 종전 투구 폼을 교정하기 위해 팔꿈치를 높이 들어 팔을 휘두르는 것을 반복하던 중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한때 1군에서 이탈했다.[29] 게다가 오픈전에서는 오른쪽 팔에 근육 파열을 일으켜 그 이후로는 장점인 호쾌함이 줄어들었다.[30] 결국 같은 해에는 개막에 맞춰 출전하지 못했지만, 같은 해 4월 25일 우·리그 대 히로시마전(유 구장)을 134구로 완투하는 등 컨디션을 회복했기 때문에 같은 해 5월 4일 히로시마전에서 1군 벤치에 합류했다.[33] 하지만 첫 승리는 8번째 등판이 된 같은 해 6월 16일 야쿠르트 13차전까지 늦어졌다. 같은 해 8월 4일 한신 18차전에서는 같은 시즌 7번째 선발 등판 기회를 얻어 (선발로서는 그 해 유일한 승리가 되는) 2승을 거두었지만 이후에는 승수를 추가하지 못하고 시즌 2승 4패의 성적으로 끝났다. 같은 해 1999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가 없었다. 시즌 종료 후 고이케 히데오, 사노 시게키, 젠무라 가즈히토와 3 대 3 트레이드로 고이케 다쿠이치, 히가시세 고타로와 함께 퍼시픽 리그로 이적하게 되어 같은 해 11월 15일에 정식으로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36] 이 트레이드는 나시다 마사타카 신임 감독 아래에서 선발 투수 보강을 노리던 긴테쓰와 이상훈의 퇴단을 받아 좌투수 보강을 진행하던 주니치의 의도가 각각 일치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37]
문카도쿠라 본인은 이적 후 트레이드가 발표되기 전에 다케다로부터 "너, 퍼·리그가 더 통할 것 같지 않아?"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으며, 본인을 취재한 이나자키 고이치도 세밀한 제구력이나 투구술에는 어려움이 있는 한편, 본인의 "힘과 힘의 승부가 더 좋다"라는 말에서 퍼·리그가 그의 성향에 더 맞을 것이라고 평했다.
2. 3.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시절
1999년 시즌 후, 가도쿠라는 고이케 히데오, 사노 시게키, 요시무라 가즈히토와의 맞트레이드를 통해 고이케 다쿠이치, 아즈세 고타로 등과 함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로 이적했다.[38]2000년 스프링 캠프에서 구단이 설정한 "체지방률 15% 이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벌칙을 받았지만, 2,000개에 가까운 투구로 몸을 단련했다.[39] 시즌 초에는 구원 투수로 시작했으나, 선발 로테이션 재편 후 첫 선발 등판에서 승리했다. 이후 부진으로 잠시 2군에 내려갔다가 복귀, 8월 19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연패를 끊었다. 최종적으로 7승 9패를 기록했다.
2001년, 가도쿠라는 생애 첫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했지만 2회 도중 강판되었다. 하지만 팀 타선의 지원으로 승리했고, 이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으며 8승 5패를 기록,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7선발승).[38] 평균자책점은 6.49로 높았고, 피홈런도 리그 최다인 27개를 기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2001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다.
2002년에는 승리 없이 시즌을 마감했다.
2003년 시즌에는 6승을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였지만, 규정 이닝을 채우지 못하며 수뇌부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시즌 후 후쿠모리 가즈오, 야노 에이지와의 트레이드로 우다카 신지와 함께 요코하마로 이적했다.[40]
2. 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2003년 시즌 후 트레이드를 통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이적했다. 2004년 6월 23일 야쿠르트전에서 요코하마 이적 후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동시에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홈런을 쳐냈다. 시즌 초에는 선발 투수를 맡았지만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 해에는 중간 계투로도 경험했다. 후반기에는 마무리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투수 코치 코타니 마사카츠의 의향에 따라 마무리 투수로도 뛰었다. 동점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3패를 기록했지만, 세이브 기회에서 구원 실패로 인한 패전은 단 한 번뿐이었다. 후반기에만 10세이브를 기록했다.2005년 8월 20일 주니치전에서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되었고 역대 네 번째인 ‘전 구단 승리’를 달성했다(자신이 소속했던 긴테쓰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 해 우시지마 감독은 가도쿠라에게 "10cm 발을 높이 들어 올려 봐."라고 조언했고 가도쿠라는 7년 만에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고 개인 최고 성적이 되는 11승을 올렸다. 최종전에서는 우시지마 감독의 배려로 중 이틀 만에 등판하여 팀 동료인 미우라 다이스케와 함께 리그 최다인 177개의 탈삼진을 기록,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석권했다.
2006년에는 작년에 비해 불안정한 투구로 평균자책점 4.84의 성적을 기록할 정도의 부진을 겪으면서 한때는 중간 계투로 조정되기도 했지만 우시지마 감독은 끈기 있게 선발로 기용해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우는 등 10승(1구원승 포함)을 올려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을 달성했다. 투구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팀의 일원으로서 두 자릿수 승리, 팀 최다승, 무엇보다 자유 계약 선수(FA) 권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복수년 계약과 연봉 인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구단 측은 "10승 10패의 투수는 필요 없다”등과 같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12월 2일, 요코하마가 가도쿠라의 잔류 교섭을 중단하면서 가도쿠라도 요코하마와의 결별을 선언하였고 메이저 리그 구단으로부터의 오퍼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기도 하는 등 “입단 테스트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요코하마보다 조건이 나빠도 타 구단”이라고까지 발언했다.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영입할 의사를 나타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면서 가도쿠라는 “매우 영광”, “하라 감독을 동경하고 있었다”라고 말해 12월 7일 요미우리와의 입단 교섭에 응했다. 2년 계약에 인센티브 2억 엔의 제시를 받아 “굉장히 높은 평가를 해 주었고 기분은 거의 굳어지고 있다.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요미우리 이적이 사실상 결정되었다. 12월 11일, 요미우리의 입단이 정식으로 확정되면서 가도쿠라는 “다음 시기의 개막 대전은 요코하마와의 3연전에서 던지고 싶다”라고 의지를 나타냈다. 한편, 가도쿠라의 이적에 따른 인적 보상으로 구도 기미야스가 요코하마로 이적했다.
2. 5.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6년 FA를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2007년에는 본인의 희망대로 개막 2차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 선발 등판하여 요코하마 팬들의 야유를 받았지만, 7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러나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8회에 후루키 가쓰아키에게 결승 홈런을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선발 등판했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5월 1일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8월 1일에 1군으로 재승격하여 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6이닝 1실점의 호투로 첫 승을 거두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14일 히로시마전에서는 타선의 대량 득점 지원이 있었지만 5회에 역전당해 4⅓이닝 7실점으로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고, 다음 날 2군으로 강등되었다. 9월 17일에 1군으로 재승격한 후에는 구원 투수가 되었지만, 9월 18일 한신과의 천왕산 경기에서 패전 투수가 되었다. 2007년에는 12경기에서 1승 5패, 평균자책점 5.97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7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중간 계투로 2경기에 등판하며 포스트 시즌 첫 출전을 기록했다.
2008년 시즌은 2군에서 시작했고, 4월 말에 구원 투수로서 1군으로 승격되었다. 11경기에 등판하여 2홀드를 기록했다. 그러나 최종 이닝에 3번 등판하여 모두 실점했고, 그 중 2번은 동점 상황에서 등판하여 2패를 기록했다. 5월 1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 연장 10회에 구리하라 겐타에게 결승 홈런을 맞아 패전 투수가 되어 2군으로 강등되었다. 6월 이후에는 2군 선발 투수로 등판했지만 1군 승격은 없었다. 2008년에는 11경기 등판으로 6년 만에 승리 없이 시즌을 마무리했다. 리그 우승 헹가래에는 참여했지만 2008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고, 2008년 일본 시리즈 출전 자격도 얻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감액 제한인 25%를 초과하는 대폭 삭감된 연봉을 제시하여 계약 갱신 협상이 결렬되었다. 본인이 출전 기회를 요구한 점도 있어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2년간 1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자유 계약으로 풀려난 노구치 시게키와 함께 시카고 컵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2. 6. 미국 및 한국 프로 야구 시절
2009년 1월 20일,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 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스프링 캠프 연습 경기에서 6경기에 출전하여 3실점으로 호투했지만, 개막 직전인 4월 2일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이후 미국 야구계를 중심으로 이적처를 모색했지만, 2009년 4월 14일 마이크 존슨의 대체 선수로 KBO 리그 팀인 SK 와이번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고, 등번호는 54번으로 배정받았다. 4월 1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2번째 투수로서 첫 등판했고, 그 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서 28경기에 등판해 시즌 8승과 5.00의 평균자책점으로 좋지 못한 성적을 보여주었으나 포스트 시즌에서 맹활약하면서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0년 3월 27일 한화전에서 긴테쓰 시절인 2001년 이후 9년 만에 개막전 선발 투수로서 등판해 7회를 8안타 2실점으로 호투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5월 4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도 호투해 개막 이후 7연승을 기록하면서 SK의 16연승을 이끈 주역이 되었다. 7월 17일 KIA 타이거즈전에서도 10승째를 올렸다. 일본 프로 야구 시대를 통해서 개인 최다가 되는 14승(13선발승으로 장원삼, 김선우와 선발승 공동 6위, 평균자책점은 3위)을 기록해 SK의 정규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SK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인 11월 5일에는 대만에서 열린 한국-타이완 클럽 챔피언십 2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11월 13일 한일 클럽 챔피언십에서는 3회 도중 3실점을 기록하면서 강판당해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 후 일본 내의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왼쪽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고 판단해 SK 와이번스에서 그와 재계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후 수술 대신 재활을 선택했고 2011년 1월 16일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괌 1차 캠프에 합류하여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1월 25일에는 삼성 라이온즈와 총액 30만 달러에 입단 계약을 체결, 등번호는 16번으로 결정했다.[68] 같은 해 5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넥센전에서 완봉 승리를 거두어 한·일 통산 100승(91선발승)을 달성하였고 한때 평균자책 1위까지 달렸으나 SK에서 나타낸 우려가 결국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그 해에는 KIA 타이거즈를 상대로 대단히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류중일 감독이 그를 포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7월부터 무릎 부상으로 인해 페이스가 점차 떨어져 있었고 2군으로 내려갔지만 끝내 삼성에서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했다. 부상으로 결국 중도 하차하게 되었지만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한 일본인 선수 중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수로 남게 되었다.[69] 그 후 삼성 라이온즈는 대체 선수로 저스틴 저마노를 영입하였다.
2. 7. 은퇴 후
2012년 1월, 일본 프로 야구계 복귀를 목표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입단 테스트에 참가했지만 불합격했다[46]. 2월에는 닛폰햄 스프링 캠프에 참가해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역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47]. 같은 해 4월, 홋카이도 다테시의 클럽 팀인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 경식 야구부에 입단하여 홋카이도 지구 예선부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을 목표로 했다[48].같은 해 5월 25일, 이와미자와 시영 야구장에서 열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홋카이도 1차 예선 1차전에서 오타루 야구 협회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여 7이닝까지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이후 경기에서 연패하여 홋카이도 지구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본인은 JR 홋카이도의 보강 선수로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7월 15일 도쿄 돔에서 열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1차전에서 토요타와의 맞대결에서 JR 홋카이도의 3번째 투수로 7회말부터 등판했지만, 2-2 동점 상황에서 사카타 아츠히코에게 결승 2점 홈런을 맞아 패전 투수가 되었다.
2012년 11월 21일, 파이터스 가마가야 스타디움(지바현 가마가야시)에서 열린 2012년 제2회 프로 야구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구단이 없었고, 결국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2013년부터 2011년에 소속되었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를 맡게 되었다. 1군 경기에는 벤치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릭 벤덴헐크를 지도하여 제구 난조의 원인이었던 인스텝을 교정했으며, 2014년에는 2군 투수 코치로 정식 계약하여 릭 벤덴헐크가 선발 에이스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했다. 2015년부터는 삼성 라이온즈의 1군 불펜 코치가 되었지만, 같은 해에 퇴단했다.
2016년부터는 TOKYO MX의 게스트 해설자로 활동하며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고, 일본 각지에서 야구 교실에 참가했다. 2017년부터는 간사이 TV와 TBS 채널에서 해설자로 출연했다. 2019년 시즌에는 친정팀인 주니치 2군 투수 코치로 현장에 복귀했다[50][51].
3. 실종과 발견, 그리고 재실종
2021년 5월 15일부터 팀 훈련에 무단으로 결석하며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에 일본 경찰이 수색에 나섰고, 우에하라 코지는 그의 안위를 걱정했으며, 타니하라 쇼스케 역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밝혔다.
6월 2일에는 요코하마의 한 공원에서 노숙자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아내는 이를 부인하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6월 6일, 아내는 블로그를 통해 카도쿠라가 집에 잘 돌아왔다고 알리며 실종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7월, 아내는 다시 카도쿠라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6월 23일 이후 3주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소식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2021년 시즌 개막 후 5월 15일 훈련부터 무단 결석하여 연락이 두절되자, 가족은 다음 날 아이치현 경찰에 수색을 요청했다. 이후 카도쿠라 본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퇴단서가 요코하마시에서 20일 소인으로 구단에 우편으로 발송되었고, 가족이 필적을 확인한 후 구단은 26일자로 이를 수리했다. 구단 대표 카토 히로유키는 "무단으로 훈련에 나오지 않은 것을 구단으로서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수리 경위를 밝혔다[52][53][54]。
6월 2일, FRIDAY 등 일부 언론에서 요코하마 시내 공원에서 노숙하는 모습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했으나[55], 아내는 블로그를 통해 이를 부인하며 당시에도 그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56]。 6월 7일, 아내는 블로그를 통해 6월 6일 밤에 귀가했으며,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진찰 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알렸다[57]。 그러나 이후에도 6월 19일에 다시 실종, 21일에 귀가, 23일에 재차 실종되는 등 실종과 귀가를 반복했다는 소식이 주간문춘을 통해 보도되었다[58]。
4. 선수로서의 특징
카도쿠라는 빠른 공과 포크볼,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사용했다.[64] 1999년에는 많은 야구 평론가로부터 "공에 힘과 스피드가 있어 무너뜨리기 어려운 투수"라는 평을 받았다.
에가와 스구루와 니노미야 키요즈미는 카도쿠라에 대해 스피드는 5단계 평가 중 4.5, 컨트롤과 기술은 각각 3으로 평가하며 "장신에서 던져 내리는 각도 있는 직구와 날카로운 낙차가 있는 포크가 장점이며, 컨트롤도 나쁘지 않지만, 호투하고 있어도 중요한 장면에서 얻어맞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정신적인 약함인지, 폼을 너무 자주 바꾸는 것에 기인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카도쿠라 본인은 2011년에 "힘 대 힘으로, 다소 대략적인 퍼시픽 리그는 나에게 맞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5. 인물
카도쿠라 켄은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와 도호쿠 복지대학을 졸업했다.
인물턱이 긴 외모 때문에 일본에서는 '아고(턱)'와 이름을 합쳐 '아고쿠라'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71], 한국에서는 '카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72] 긴테쓰 시절에는 팀 동료로부터 "쇼벨카"라고 불리기도 했다. 본인은 "턱 길이로는 현역 1위"라고 자칭하며 턱에 얽힌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2010년 한국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때는 턱이 특징적인 다른 팀 선수 2명과 함께 "턱 삼형제"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동료로 활동했고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 감독인 선동열로부터 "턱, 아직 젊구먼"이라는 말을 일본어로 듣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아장"이라는 별명도 있다.
2008년부터는 사이타마현 야시오시에서 지역 초등학생 팀을 대상으로 "카도쿠라 켄배 쟁탈 소년 야구 대회"를 개최하며 소년 야구와 선수 육성에 기여하고 있다.
아내와 함께 동물 애호가로 알려져 있으며, 안락사 직전의 개를 구조하는 등 동물 보호 활동에 헌신하고 있다. 부부는 동물 보호 활동을 하는 일반 사단 법인 "에시컬 K"의 대표를 맡고 있다. 2021년 1월에는 11년간 학대받던 개를 보호하여 "폰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보살폈다.
선수 경력카도쿠라 켄은 주니치 드래건스(1996년 ~ 1999년),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2000년 ~ 2003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2004년 ~ 200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7년 ~ 2008년)에서 NPB 선수 생활을 했다. 13년간의 NPB 생활 후, 2009년에는 SK 와이번스에 입단하며 KBO 리그에 데뷔했고[1], 2011년 1월에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은퇴 후에는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에서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2012년).
2019년부터 2021년까지는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를 맡았으나, 2021년 5월 15일에 사임했다.[2] 한편, 2021년에는 실종되었다가 22일 만에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3][4]
코치 경력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최다 탈삼진: 1회 (2005년)
- 탈삼진왕: 1회 (2005년)
- JA전농 Go・Go상: 1회 (최다 탈삼진상: 2001년 5월)
- KBO 월간 MVP: 1회 (2010년 4월)
- 건강한 이루마・생기 넘치는 공로상 (제5호・2006년 1월 26일) ※역대 4번째 전 구단 승리 공적
개인 기록
- 첫 등판: 1996년 7월 2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7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에 헨슬리 뮬렌스로부터
- 첫 승리: 1996년 7월 2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9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첫 선발・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96년 8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4차전 (나고야 돔)
- 첫 세이브: 2004년 8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22차전 (도쿄 돔), 9회말에 5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 첫 홀드: 2008년 4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NPB 이정표 기록
- 1000 투구 이닝: 2005년 8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3차전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5회말 2사 3구에 니오카 토모히로를 헛스윙 삼진으로 달성 (역대 303번째)
- 1000 탈삼진: 2006년 4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초에 아오키 노리치카로부터 헛스윙 삼진을 잡아 달성 (역대 118번째)
NPB 타격 기록
- 첫 안타: 1996년 8월 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초에 다카하시 겐으로부터 우전 안타
- 첫 타점: 1997년 5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요시이 마사토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홈런: 2004년 6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후지이 슈고로부터 중월 솔로
KBO
- KBO 올스타전 출장: 1회 (2010년)
등번호
- 25 (1996년 ~ 1999년)
- 23 (2000년 ~ 2002년)
- 17 (2003년)
- 24 (2004년 ~ 2006년)
- 27 (2007년 ~ 2008년)
- 54 (2009년 ~ 2010년)
- 16 (2011년)
- 88 (2013년 ~ 2015년)
- 87 (2019년 ~ 2021년)
연도별 투수 성적
연 도 | 소 속 | 등 판 | 선 발 | 완 투 | 완 봉 | 무 4 구 | 승 리 | 패 전 | 세 이 브 | 홀 드 | 승 률 | 타 자 | 이 닝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 4 | 몸 맞 | 탈 삼 진 | 폭 투 | 보 크 | 실 점 | 자 책 점 | 평 자 책 | W H I P |
---|---|---|---|---|---|---|---|---|---|---|---|---|---|---|---|---|---|---|---|---|---|---|---|---|---|
1996년 | 주니치 | 14 | 11 | 3 | 1 | 1 | 7 | 3 | 0 | -- | 0.700 | 302 | 72.1 | 63 | 6 | 30 | 1 | 0 | 65 | 3 | 0 | 27 | 25 | 3.11 | 1.29 |
1997년 | 34 | 26 | 2 | 0 | 0 | 10 | 12 | 0 | -- | 0.455 | 747 | 160.0 | 173 | 13 | 96 | 4 | 10 | 143 | 4 | 1 | 95 | 84 | 4.73 | 1.68 | |
1998년 | 26 | 25 | 3 | 2 | 0 | 10 | 9 | 0 | -- | 0.526 | 651 | 153.2 | 133 | 10 | 66 | 0 | 9 | 115 | 9 | 0 | 60 | 58 | 3.40 | 1.30 | |
1999년 | 15 | 8 | 0 | 0 | 0 | 2 | 4 | 0 | -- | 0.333 | 227 | 49.0 | 61 | 7 | 18 | 2 | 2 | 38 | 3 | 0 | 33 | 31 | 5.69 | 1.61 | |
2000년 | 긴테쓰 | 23 | 18 | 4 | 1 | 0 | 7 | 9 | 0 | -- | 0.438 | 501 | 117.1 | 108 | 13 | 46 | 0 | 4 | 109 | 2 | 0 | 54 | 51 | 3.91 | 1.31 |
2001년 | 32 | 21 | 0 | 0 | 0 | 8 | 5 | 0 | -- | 0.615 | 552 | 123.1 | 136 | 27 | 51 | 1 | 0 | 122 | 4 | 0 | 92 | 89 | 6.49 | 1.52 | |
2002년 | 16 | 1 | 0 | 0 | 0 | 0 | 4 | 0 | -- | 0.000 | 124 | 29.1 | 25 | 4 | 12 | 3 | 0 | 32 | 0 | 0 | 12 | 12 | 3.68 | 1.26 | |
2003년 | 20 | 16 | 0 | 0 | 0 | 6 | 4 | 0 | -- | 0.600 | 432 | 98.1 | 102 | 12 | 44 | 3 | 5 | 103 | 5 | 0 | 47 | 46 | 4.21 | 1.48 | |
2004년 | 요코하마 | 42 | 7 | 0 | 0 | 0 | 4 | 8 | 10 | -- | 0.333 | 336 | 76.1 | 84 | 16 | 26 | 3 | 3 | 86 | 7 | 0 | 42 | 39 | 4.60 | 1.44 |
2005년 | 29 | 27 | 4 | 1 | 1 | 11 | 8 | 0 | 0 | 0.579 | 832 | 197.2 | 175 | 19 | 76 | 1 | 6 | 177 | 6 | 0 | 80 | 74 | 3.37 | 1.27 | |
2006년 | 28 | 25 | 2 | 0 | 0 | 10 | 9 | 0 | 0 | 0.526 | 691 | 154.1 | 187 | 19 | 51 | 0 | 3 | 114 | 1 | 0 | 90 | 83 | 4.84 | 1.54 | |
2007년 | 요미우리 | 12 | 5 | 0 | 0 | 0 | 1 | 5 | 0 | 0 | 0.167 | 144 | 31.2 | 36 | 7 | 14 | 2 | 0 | 26 | 2 | 1 | 21 | 21 | 5.97 | 1.58 |
2008년 | 11 | 0 | 0 | 0 | 0 | 0 | 2 | 0 | 2 | 0.000 | 56 | 12.2 | 13 | 2 | 6 | 0 | 0 | 16 | 0 | 0 | 5 | 5 | 3.55 | 1.50 | |
2009년 | SK | 28 | 23 | 0 | 0 | 0 | 8 | 4 | 0 | 1 | 0.667 | 564 | 126.0 | 141 | 19 | 53 | 0 | 7 | 98 | 2 | 0 | 78 | 70 | 5.00 | 1.54 |
2010년 | 30 | 27 | 0 | 0 | 0 | 14 | 7 | 0 | 0 | 0.667 | 647 | 153.2 | 146 | 14 | 52 | 2 | 6 | 143 | 11 | 0 | 65 | 55 | 3.22 | 1.29 | |
2011년 | 삼성 | 16 | 16 | 1 | 1 | 0 | 5 | 6 | 0 | 0 | 0.455 | 376 | 86.1 | 92 | 9 | 31 | 0 | 5 | 62 | 5 | 0 | 55 | 39 | 4.07 | 1.42 |
NPB : 13년 | 302 | 190 | 18 | 5 | 2 | 76 | 82 | 10 | 2 | 0.481 | 5595 | 1276.0 | 1296 | 155 | 536 | 20 | 42 | 1146 | 46 | 2 | 658 | 618 | 4.36 | 1.44 | |
KBO : 3년 | 74 | 66 | 1 | 1 | 0 | 27 | 17 | 0 | 1 | 0.614 | 1587 | 366.0 | 379 | 42 | 136 | 2 | 18 | 303 | 18 | 0 | 198 | 164 | 4.03 | 1.41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6. 상세 정보
카도쿠라 켄은 1996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 야구 기구(NPB)에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했다. 2021년에는 잠시 실종되기도 했다.[3][4]
그의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선수 경력
- NPB
- * 주니치 드래건스(1996년 ~ 1999년)
-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2000년 ~ 2003년)
-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2004년 ~ 2006년)
- * 요미우리 자이언츠(2007년 ~ 2008년)
- 사회인 시대
- *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2012년)
주니치 드래건스,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3년간 NPB 선수로 활동했으며, 2009년 SK 와이번스에 입단하여 KBO 리그에 데뷔했다.[1] 2011년 1월에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2012년에는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에서 사회인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2013년부터는 코치로 활동했는데, 삼성 라이온즈 인스트럭터 코치(2013년 ~ 2014년), 삼성 라이온즈 불펜 코치 (2015년),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2019년 ~ 2021년)를 역임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직은 2021년 5월 15일에 사임했다.[2]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타이틀
- * 최다 탈삼진: 1회 (2005년)
- * 탈삼진왕: 1회 (2005년)
- 수상
- * JA전농 Go・Go상: 1회 (최다 탈삼진상: 2001년 5월)
- * KBO 월간 MVP: 1회 (2010년 4월)
- * 건강한 이루마・생기 넘치는 공로상 (제5호・2006년 1월 26일) ※역대 4번째 전 구단 승리 공적
; 개인 기록
- 첫 등판: 1996년 7월 2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7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에 헨슬리 뮬렌스로부터
- 첫 승리: 1996년 7월 2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9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첫 선발・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96년 8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4차전 (나고야 돔)
- 첫 세이브: 2004년 8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22차전 (도쿄 돔), 9회말에 5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 첫 홀드: 2008년 4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NPB 이정표 기록
- 1000 투구 이닝: 2005년 8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3차전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5회말 2사 3구에 니오카 토모히로를 헛스윙 삼진으로 달성 (역대 303번째)
- 1000 탈삼진: 2006년 4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초에 아오키 노리치카로부터 헛스윙 삼진 (역대 118번째)
NPB 타격 기록
- 첫 안타: 1996년 8월 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초에 다카하시 겐으로부터 우전 안타
- 첫 타점: 1997년 5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요시이 마사토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홈런: 2004년 6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후지이 슈고로부터 중월 솔로
KBO
- KBO 올스타전 출장: 1회 (2010년)
; 등번호
- 25 (1996년 ~ 1999년)
- 23 (2000년 ~ 2002년)
- 17 (2003년)
- 24 (2004년 ~ 2006년)
- 27 (2007년 ~ 2008년)
- 54 (2009년 ~ 2010년)
- 16 (2011년)
- 88 (2013년 ~ 2015년)
- 87 (2019년 ~ 2021년)
; 연도별 투수 성적
연 도 | 소 속 | 등 판 | 선 발 | 완 투 | 완 봉 | 무 4 구 | 승 리 | 패 전 | 세 이 브 | 홀 드 | 승 률 | 타 자 | 이 닝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 4 | 몸 맞 | 탈 삼 진 | 폭 투 | 보 크 | 실 점 | 자 책 점 | 평 자 책 | W H I P |
---|---|---|---|---|---|---|---|---|---|---|---|---|---|---|---|---|---|---|---|---|---|---|---|---|---|
1996년 | 주니치 | 14 | 11 | 3 | 1 | 1 | 7 | 3 | 0 | -- | 0.700 | 302 | 72.1 | 63 | 6 | 30 | 1 | 0 | 65 | 3 | 0 | 27 | 25 | 3.11 | 1.29 |
1997년 | 34 | 26 | 2 | 0 | 0 | 10 | 12 | 0 | -- | 0.455 | 747 | 160.0 | 173 | 13 | 96 | 4 | 10 | 143 | 4 | 1 | 95 | 84 | 4.73 | 1.68 | |
1998년 | 26 | 25 | 3 | 2 | 0 | 10 | 9 | 0 | -- | 0.526 | 651 | 153.2 | 133 | 10 | 66 | 0 | 9 | 115 | 9 | 0 | 60 | 58 | 3.40 | 1.30 | |
1999년 | 15 | 8 | 0 | 0 | 0 | 2 | 4 | 0 | -- | 0.333 | 227 | 49.0 | 61 | 7 | 18 | 2 | 2 | 38 | 3 | 0 | 33 | 31 | 5.69 | 1.61 | |
2000년 | 긴테쓰 | 23 | 18 | 4 | 1 | 0 | 7 | 9 | 0 | -- | 0.438 | 501 | 117.1 | 108 | 13 | 46 | 0 | 4 | 109 | 2 | 0 | 54 | 51 | 3.91 | 1.31 |
2001년 | 32 | 21 | 0 | 0 | 0 | 8 | 5 | 0 | -- | 0.615 | 552 | 123.1 | 136 | 27 | 51 | 1 | 0 | 122 | 4 | 0 | 92 | 89 | 6.49 | 1.52 | |
2002년 | 16 | 1 | 0 | 0 | 0 | 0 | 4 | 0 | -- | 0.000 | 124 | 29.1 | 25 | 4 | 12 | 3 | 0 | 32 | 0 | 0 | 12 | 12 | 3.68 | 1.26 | |
2003년 | 20 | 16 | 0 | 0 | 0 | 6 | 4 | 0 | -- | 0.600 | 432 | 98.1 | 102 | 12 | 44 | 3 | 5 | 103 | 5 | 0 | 47 | 46 | 4.21 | 1.48 | |
2004년 | 요코하마 | 42 | 7 | 0 | 0 | 0 | 4 | 8 | 10 | -- | 0.333 | 336 | 76.1 | 84 | 16 | 26 | 3 | 3 | 86 | 7 | 0 | 42 | 39 | 4.60 | 1.44 |
2005년 | 29 | 27 | 4 | 1 | 1 | 11 | 8 | 0 | 0 | 0.579 | 832 | 197.2 | 175 | 19 | 76 | 1 | 6 | 177 | 6 | 0 | 80 | 74 | 3.37 | 1.27 | |
2006년 | 28 | 25 | 2 | 0 | 0 | 10 | 9 | 0 | 0 | 0.526 | 691 | 154.1 | 187 | 19 | 51 | 0 | 3 | 114 | 1 | 0 | 90 | 83 | 4.84 | 1.54 | |
2007년 | 요미우리 | 12 | 5 | 0 | 0 | 0 | 1 | 5 | 0 | 0 | 0.167 | 144 | 31.2 | 36 | 7 | 14 | 2 | 0 | 26 | 2 | 1 | 21 | 21 | 5.97 | 1.58 |
2008년 | 11 | 0 | 0 | 0 | 0 | 0 | 2 | 0 | 2 | 0.000 | 56 | 12.2 | 13 | 2 | 6 | 0 | 0 | 16 | 0 | 0 | 5 | 5 | 3.55 | 1.50 | |
2009년 | SK | 28 | 23 | 0 | 0 | 0 | 8 | 4 | 0 | 1 | 0.667 | 564 | 126.0 | 141 | 19 | 53 | 0 | 7 | 98 | 2 | 0 | 78 | 70 | 5.00 | 1.54 |
2010년 | 30 | 27 | 0 | 0 | 0 | 14 | 7 | 0 | 0 | 0.667 | 647 | 153.2 | 146 | 14 | 52 | 2 | 6 | 143 | 11 | 0 | 65 | 55 | 3.22 | 1.29 | |
2011년 | 삼성 | 16 | 16 | 1 | 1 | 0 | 5 | 6 | 0 | 0 | 0.455 | 376 | 86.1 | 92 | 9 | 31 | 0 | 5 | 62 | 5 | 0 | 55 | 39 | 4.07 | 1.42 |
NPB : 13년 | 302 | 190 | 18 | 5 | 2 | 76 | 82 | 10 | 2 | 0.481 | 5595 | 1276.0 | 1296 | 155 | 536 | 20 | 42 | 1146 | 46 | 2 | 658 | 618 | 4.36 | 1.44 | |
KBO : 3년 | 74 | 66 | 1 | 1 | 0 | 27 | 17 | 0 | 1 | 0.614 | 1587 | 366.0 | 379 | 42 | 136 | 2 | 18 | 303 | 18 | 0 | 198 | 164 | 4.03 | 1.41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6. 1. 출신 학교
세이보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호쿠 복지대학을 졸업했다.6. 2. 선수 경력
;NPB- 주니치 드래건스(1996년 ~ 1999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2000년 ~ 2003년)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2004년 ~ 2006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2007년 ~ 2008년)
;KBO
;사회인 시대
-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2012년)
13년간의 일본 야구 기구(NPB) 생활을 마치고, 카도쿠라 켄은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SK 와이번스에서 데뷔했다.[1] 그는 2011년 1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2019년 현재, 카도쿠라 켄은 주니치 드래곤스 2군 투수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다.
2021년 5월 15일, 그는 코치직에서 사임했다.[2]
카도쿠라 켄은 2021년에 실종되었으나,[3] 22일 만에 다시 나타났다.[4]
6. 2. 1. NPB
카도쿠라 켄은 다음 NPB 팀에서 활동했다.- 주니치 드래건스(1996년 ~ 1999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2000년 ~ 2003년)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2004년 ~ 2006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2007년 ~ 2008년)
13년간의 일본 야구 기구(NPB) 생활을 마치고,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SK 와이번스에서 데뷔했다.[1] 그는 2011년 1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6. 2. 2. KBO
SK 와이번스(2009년 ~ 2010년)삼성 라이온즈(2011년)
13년간의 일본 야구 기구(NPB) 생활을 마치고, 카도쿠라 켄은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SK 와이번스에서 데뷔했다.[1] 그는 2011년 1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6. 2. 3. 사회인 시대
다테 히지리가오카 병원에서 사회인으로 활동했다(2012년).6. 3. 코치 경력
6. 3. 1. KBO
삼성 라이온즈 인스트럭터 코치(2013년 ~ 2014년)삼성 라이온즈 불펜 코치 (2015년)
6. 3. 2. NPB
주니치 드래건스 2군 투수 코치(2019년 ~ 2021년)13년간의 일본 야구 기구(NPB) 생활을 마치고, 카도쿠라 켄은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의 SK 와이번스에서 데뷔했다.[1] 그는 2011년 1월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했다.
카도쿠라 켄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 2군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2021년 5월 15일, 그는 코치직에서 사임했다.[2]
카도쿠라 켄은 2021년에 실종되었으나,[3] 22일 만에 다시 나타났다.[4]
6.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해당 정보가 없습니다.6. 4. 1. 타이틀
- 최다 탈삼진: 1회 (2005년)
- 탈삼진왕: 1회 (2005년)
6. 4. 2. 수상
- JA전농 Go・Go상: 1회 (최다 탈삼진상: 2001년 5월)
- KBO 월간 MVP: 1회 (2010년 4월)
- 건강한 이루마・생기 넘치는 공로상 (제5호・2006년 1월 26일) ※역대 4번째 전 구단 승리 공적
6. 5. 개인 기록
다음은 카도쿠라 켄의 개인 기록이다.- 첫 등판: 1996년 7월 2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7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에 헨슬리 뮬렌스로부터
- 첫 승리: 1996년 7월 2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9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무실점
- 첫 선발・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96년 8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4차전 (나고야 돔)
- 첫 세이브: 2004년 8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22차전 (도쿄 돔), 9회말에 5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 첫 홀드: 2008년 4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7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NPB 이정표 기록
- 1000 투구 이닝: 2005년 8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3차전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5회말 2사 3구에 니오카 토모히로를 헛스윙 삼진으로 달성 ※역대 303번째
- 1000 탈삼진: 2006년 4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초에 아오키 노리치카로부터 헛스윙 삼진 ※역대 118번째
NPB 타격 기록
- 첫 안타: 1996년 8월 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초에 다카하시 겐으로부터 우전 안타
- 첫 타점: 1997년 5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요시이 마사토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홈런: 2004년 6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후지이 슈고로부터 중월 솔로
KBO
- KBO 올스타전 출장: 1회 (2010년)
6. 5. 1. NPB 투수 기록
- 첫 등판: 1996년 7월 2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7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 첫 탈삼진: 같은 날, 5회말에 헨슬리 뮬렌스에게서 탈삼진을 기록했다.
- 첫 승리: 1996년 7월 2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9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5회말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2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 첫 선발・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96년 8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4차전 (나고야 돔)에서 기록했다.
- 첫 세이브: 2004년 8월 1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22차전 (도쿄 돔)에서 9회말에 5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올렸다.
- 첫 홀드: 2008년 4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7회말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홀드를 기록했다.
6. 5. 2. NPB 이정표 기록
1000투구 이닝은 2005년 8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3차전 (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에서 5회말 2사 3구에 니오카 토모히로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으며 달성했다 (역대 303번째).1000탈삼진은 2006년 4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차전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1회초에 아오키 노리치카로부터 헛스윙 삼진을 잡아 달성했다 (역대 118번째).
6. 5. 3. NPB 타격 기록
- 첫 안타: 1996년 8월 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8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초에 다카하시 겐으로부터 우전 안타
- 첫 타점: 1997년 5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요시이 마사토로부터 우전 적시타
- 첫 홈런: 2004년 6월 2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12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 4회초에 후지이 슈고로부터 중월 솔로 홈런
6. 5. 4. KBO
KBO 올스타전에는 2010년 1회 출장했다.6. 6. 등번호
25 (1996년 ~ 1999년)23 (2000년 ~ 2002년)
17 (2003년)
24 (2004년 ~ 2006년)
27 (2007년 ~ 2008년)
54 (2009년 ~ 2010년)
16 (2011년)
88 (2013년 ~ 2015년)
87 (2019년 ~ 2021년)
6. 7. 연도별 투수 성적
도
속
판
발
투
봉
4
구
리
전
이
브
드
률
자
닝
안
타
홈
런
넷
4
맞
삼
진
투
크
점
책
점
자
책
H
I
P